지난번 '07년 5월 24일 수석도에 대하여 한 번 정리한 적이 있다. 그러나 형이하학적인 면에만 치우쳐져 있어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수석인들이 말하는 수석도라는 개념의 실체가 무엇인가 좀 더 폭 넓고 깊은 고찰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번 현실세계의 사물에 근거한 수석도에서 수석의 안목을 높이 쌓아 수석에서의 완성미를 추구하고 수석을 매개로 한 문예창작의 예술활동을 병행한 작품 활동으로 수석취미 문화를 한 차원 더 깊고 심오하게 발전시켜 나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 이도 사물을 기본으로 한 접근이다.
그런데 우리가 삶이 힘들거나 고달플 때 수석과 대면하면서 수석미를 음미하며 스트레스를 풀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무의식적으로 삶의 문제에 대해 말 없는 수석으로부터 문제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시도하는 때도 있다. 즉 수석에서의 형이상학적인 접근이다.
인간사 종교적으로 접근해보면 서양은 기독교 문화라 한다면 동양은 불교와 유교문화라 할 수 있다. 우리의 생활 문화에는 유교와 불교적인 문화가 많이 침투되어 있다. 필자는 지금은 냉담하고 있지만 천주교를 믿는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르고 그 접근이 어렵다. 아무튼 옆에서 지켜보면 불교인들은 말 없는 부처님 앞에서 불공을 드리고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수련을 한다. 힘들고 어려울 때 부처님 앞에서 하소연도 해보고 물어도 보지만 결국은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
과거 우리 선조는 돌과 무척 가까웠고 돌에서 해답을 찾고자 하였다. 무거운 돌을 보면 마음이 가라앉고 커다란 바위 같은 돌은 자연 일부이고 나아가 신이었다. 그래서 돌과 관련된 토속 신앙이 발전하였다. 돌과 관련된 것을 보면 고대 고인돌에서 시작하여 토속신앙의 서낭당에 돌 쌓기, 돌 신앙, 남근석 신앙에서 불교문화의 유입으로 돌부처와 불상으로 발전하여 내려왔다고 볼 수 있다.
수석도 작지만 돌이다. 우리는 그 말 없는 수석 앞에서 때때로 많은 것을 묻거나 의논하며 답을 듣기를 원하기도 한다. 어떤 체계화된 종교는 아니지만 내면의 정신적인 작용이고 형이상학적인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수석도라고 하면 보편적인 형이하학적인 그런 수석취미의 접근에서 일부는 위에 언급하였듯이 인생의 답을 찾고자 하는 그런 형이상학적인 면을 찾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떤 의미에서 말 없는 부처님 앞에서 깨달음을 찾는 것이나 말 없는 수석 앞에서 인생의 해답을 찾고자 함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그럼에도, 그것은 꽤 높은 형이하학적인 수석도의 수준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본다. 과거 선조는 돌 신앙에서 수석을 몰라도 단지 돌에서 문제해결의 답을 찾거나 구원을 청하였기 때문이다. 단지 수석인들이 수석취미 생활을 하면서 다른 일반인들보다 좀 더 용이하게 형이상학적인 수석도에 접근하게 된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결국, 수석도는 수석의 예절을 갖추고 수석의 안목을 높이고 나아가 수석의 문예창작 활동으로 애석 풍류를 즐기는 형이하학적인 면과 인생의 해답을 찾고자 하는 구도자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면이 함께 내재하여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후자 쪽은 불교와도 비슷하고 그래서 수석인 중에는 불교인이 많고 또 달마, 면벽 달마, 관음, 십육 나한, 도승, 기원 등 불교와 관련된 수석도 많다. 이번 '07년 5월 안양연합 전에서의 색즉시공의 '수월관음도'도 독특하였다. 그래서 수석과 함께 불교를 배운다면 수석도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수석취미의 근간인 형이하학적인 수석문화는 수석인이 함께 연구 발전시켜 나가야 하겠지만 수석도에 있어서의 형이상학적인 부분은 개인적으로 노력해서 찾아가야 할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어떤 면에서는 종교와 같은 의미의 것으로 각자의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본다.
단지 스스로 깨닫고 알게 된 것을 글로 표현하여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게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가 앞서간 유명한 성인들의 말을 듣고 인생의 교훈과 지표로 삼는 것과 같이 후세의 사람들에게 유익한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석명: 백팔번뇌, 크기: 9x9x5, 산지: 서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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