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4회 율곡문화제
2011.10.12.
얼마 전 수사공 종회에서 전화가 왔다. 10월 8일 율곡문화제 행사장에 가는데 참여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 후손으로 율곡문화제에 한번 참석하고 싶었는데 만사 제치고 참여한다고 하였다. 부친이 돌아가신 후 종회에 참석해 왔는데 종회에 참석하면 묘한 두 가지 느낌이 있다. 첫째 나이 드신 분들이 주로 참여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훌륭하신 선조에 비해 한참 부족한 자신이 무척 위축된다.
그러나 언젠가 한집안에 위대한 인물이 그렇게 자주 나오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던 웃지 못할 일도 있었다. 어릴 적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꾀죄죄한 코흘리개를 보고 어떤 노인이 성이 어떻게 되느냐고 물어 덕수이씨라고 하였더니 어디 가서든지 행동 가짐을 올바르게 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무슨 의미인지 몰랐지만, 그 후 세월이 많이 흘러 알게 되었어도 원래 많이 부족한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행사장에 가는 것 아내에게 물어보니 아내도 흔쾌히 동행하겠다고 하여 함께 참석하였다. 종회 사무실 앞에는 율곡문화제가 열리는 파주로 출발할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파주는 선산이 있는 곳이다. 얼마 전 LG LCD 공장이 들어온다고 하여 일부 조상묘를 이장한 아픈 기억이 있는 곳이다. 수사공 종회가 최근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데 율곡문화제는 종회에서 이번에 4번째 참여한다고 한다. 가는 길에 종회에서 행사 일정표와 대현 율곡 할아버지의 내력에 대한 유인물을 돌려주며 설명해주었다. 행사장에 도착하니 다양한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었다.
제24회 율곡문화제 주요 일정표
▣10월 7일 / 금요일
15:00~17:00 율곡사상 학술강연회 [시민회관] 19:30~21:00 경축전야제 [문산행복센터] (금난새와 함께 하는 해설이 있는 음악회)
▣10월 8일 / 토요일
09:00~16:00 파주유적지 순례 [공설운동장] 09:30~16:00 백일장, 미술제 [율곡선생유적지] 09:30~10:30 유가행렬 및 길놀이 [율곡고 - 자운서원] 10:30~11:00 개막식 [무대] 11:00~11:50 추향제 [자운서원] 12:00~13:00 전통혼례 [잔디광장] 13:00~14:00 전국한시백일장, 휘호대회 [자운서원] 13:00~14:00 줄타기 [잔디광장] 14:00~15:00 우리놀이 한마당 [무대] 15:00~15:30 서예퍼포먼스 [잔디광장] 15:30~16:30 마당놀이 - 놀부전 [잔디광장] 17:00~18:30 서원음악회 [무대]
* 우리 종회는 10월 8일 개막식과 추향제 행사만 참여하고 오후에는 파주 인근의 여러 선영을 참배하였다.
율곡(栗谷) 이이(李珥)
율곡 선생(1536~1584)은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이자 경세가로 선대의 세거지인 파평면 율곡리에서 성장하였다. 자는 숙헌(淑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제(愚제).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아버지는 사원부 감찰 원수(元秀), 어머니는 사임당 신씨(師任堂 申氏)로, 1536년 (중종31) 외가인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율곡을 낳던 날 밤 어머니기 꿈에,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 주어 아명을 현룡(現龍)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이미 3세에 글을 읽었고, 8세에 화석정(化石亭)에 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화석정은 5대조인 강평공 명신이 세운 정자로, 어린 율곡에게는 뛰어놀며 꿈을 키우던 곳이었고, 관직 생활을 청산하고 낙향하였을 때는 후진을 양성하고 시대를 담론하던 장소였다.
1548(명종31) 13세의 나이로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아홉 번을 장원급제해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라 일컬어졌다. 22세에 성주목사 노경린(盧慶麟)의 딸과 혼인하였다. 29세 되던 해 호조좌랑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하게 되는데, 예조좌랑, 사간원정언, 이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584년 (선조 17) 음력 1월 16일 48세의 나이로 별세, 법원읍 자운산 기슭의 덕수이씨(德水李氏) 선영에 묻혔다. 파주의 자운서원(紫雲書院)을 비롯하여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소현서원), 강릉의 송담서원(송담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배향되었다. 1624년 (인조 2) 문성이라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 (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학교모범』『성학집요』『격몽요결』『소학집주』등과 이를 집대성한『율곡전서』가 있다. 율곡 선생은 평소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을 주창하면서 기호학파를 형성 주도하여 영남학파의 거두인 퇴계 이황(退溪 李滉)과 쌍벽을 이루었다. 또한, 경세가로서도 큰 업적을 남겼는데, 사창(社倉)설치, 대동법(大同法)실시, 10만 양병설 등 정치, 경제, 교육, 국방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하여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물론 이러한 경향의 바탕에는 우리 고장 파주(坡州)를 빼놓을 수 없다. 그에게 있어 이곳은, 선대의 덕수이씨들이 대대로 터를 지켜왔던 곳이고, 우계 성혼, 구봉 송익필 등과 교유하며 한국 철학의 큰 줄기를 가다듬는 학문적 성장과 사상 형성의 배경이 되었으며, 나아가 조선사회의 석학으로 자리하게 한 기본적 토양이 되었던 곳이다. 대표적인 호인 <율곡> 또한 이곳 파주시의 파평면 율곡리에서 따온 것으로, 파주는 율곡 선생의 본향(本鄕)이며 행사 주관 문향 파주(文香 坡州)의 근간(根幹)에 율곡 선생이 있다고 하겠다.
자료출처: 율곡문화제 행사장 제공 팸플릿(소책자)

율곡선생유적지 입구

율곡선생유적지 관람료
평상시에는 관람료를 받는 것 같다. 개인 대인 1,000, 소인 500, 단체 대인 800, 소인 400

행사환영 플래카드




전통유가행렬 재연

율곡문화제 개막식
주최: 파주시, 주관: 파주문화원, 제24회 율곡문화제 집행위원회 신수지 아나운서 사회로 진행

식전행사

개회사
이인재 파주시장 개회사


율곡의 노래
율곡의 노래가 있었다. 모두 합창하며 개막식이 끝났다.





추향제가 열릴 자운서원
파주에 거주하는 덕수이씨라 하여도 행사에 직접 관여할 수 없다 하여 특이하다 생각 듬 추향제 자운서원 주관 진행



추향제
자운서원에서 추향제가 열리고 있는 모습


전통 혼례
잔디광장에서는 전통 혼례식이 거행되고 있다.


율곡 기념관

율곡문화제 행사 현장
율곡문화제 행사장에서는 백일장, 미술제, 전통혼례 외에 다양한 민속놀이가 진행되었다.
대현 율곡(大賢 栗谷)의 내력
1. 율곡의 탄생: 이조 중종(中宗) 31년(1536) 병신(丙申)년 12월 26일 인시(寅時) 오전 4시 강릉 북평촌(北枰村) 외가 오죽헌(烏竹軒)에서 탄생하시었다. 어머님 사임당 나이 33세요, 아버님 이원수 공의 나이 36세였다. 외조부 신명화공, 외조모 요인이씨였다.
2. 사임당이 율곡을 낳으신 새벽 꿈에 동해에서 검은 용이 솟구쳐 하늘 높이 오르는 꿈을 꾸시고 출산을 하시어서 율곡의 아명을 견룡이라 지시고, 출산하신 방을 몸용실(夢龍室)이라 하였다.
3. 덕수이씨(德水李氏) 13세로 탄생하신 율곡(栗谷)은 水使公이 큰할아버지다. 오죽헌에서 낳으신 율곡은 6살 때 어머님 사임당을 따라 5남매가 서울로 오셨다.
4. 일찍이 사임당은 四書(논어, 맹자, 중용, 대학) 五經(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에 통달하여 높은 학문에 이르고 있었다. 이 높은 학문과 식견으로 신동(神童)이신 율곡(셋째 아들)을 가르치셨으니, 국가에 대한 충성과 효친 사상이 과히 천재적이고 대 철인이었다.
5. 우리나라의 조선 시대(朝鮮 時代)의 대철인이라면 퇴계 선생과 율곡을 대철인(大哲人)이라 꼽는데, 퇴계 선생은 큰 벼슬을 안 하시고, 율곡 선생은 큰 벼슬과 국가를 위하여(임진왜란 예언) 임금(선조)께 상소 형조판서 시절 16년 8월(병조판서 12월)에 10만 양병책을 상소(책 신사임당 304페이지)를 올리며 극구 유비무환(有備無患)을 주장하셨다.
6. 그 당시 이순신(19촌 간)이 내금위(內禁衛: 지금의 경호실)에 있었다. 미관말직(장교 초급)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에게 이순신 장군을 소개하여 "장차 三韓을 건질 큰 인물이 될 것이니 기회가 있으면 중용하기 바란다."라고 부탁까지 했다고 한다. (東人 유성룡은 養兵說 반대)
7. 율곡 선생이 세상을 떠나신 지 10년 만인 선조(宣祖) 25년 3월에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이끄는 일본 대군이 조총으로 무장하고 부산포로 물밀 듯이 상륙하여 아름다운 이 강산 조선 천지를 휩쓸며 짓밟아 7년간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고 선조는 율곡리 화석정 나루를 밤중에 건너 의주로 몽진(피난)하였다. 율곡의 예언대로 충무공이 결사 항전하여 전남지방 일부만 겨우 부지하다 풍신수길(도요도미 히데요시)이 급사하자 일본에서는 "도구가와이에야스" 德川家康이 정권을 잡으니 철군하여 임진왜란은 끝나고, 조선에 왔던 小西行長 등은 덕천에게 반기를 들다 잡히어 참수당하고 충무공과 싸웠던 수군 사령관 와끼자와는 할복자살하였다.
자료출처: 德水李氏 水使公 宗會 油印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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