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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선영과 현충사 참배

정의&자유 2018. 7. 8. 16:38

충무공 선영과 현충사 참배
        2018.07.08.

        덕수 이씨 수사공 소종파에서 7월 6일 선조 선영 참배하러 간다고 한다. 수사공은 충무공에는 직계가 아니고 방계에 해당하여 주로 율곡 행사에 많이 참여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 선조 선영 참배에 다른 선영과 함께 충무공 선영과 현충사 참배도 들어있어 신청했다. 충무공 선영 지리도 잘 모르고 혼자서 찾아가기 어렵다. 충무공 선영과 현충사는 꼭 가보고 싶었던 곳이다. 일행은 시조 선영부터 참배했는데 여기서는 관심이 많은 충무공 선영과 현충사에 대해 올린다.

*현충사와 이충무공 묘소에 대해 자세한 내용은 현충사 관리소 홈페이지 참조.
 

 



이충무공 묘소 입구




이충무공 묘소 약도: 현충사 관리소


 ◎ 아산 이충무공 묘소
  
       음력 1958년 11월 19일 노량진 해전에서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삼도수군 통제영인 고금도를 거쳐 아산 금성산으로 옮겨 모셔졌다. 이후 순국 16년 뒤인 1614년 현재의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부인(상주방씨)과 합장되었다. 또한 묘역을 관리하고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묘소 아래에 위토를 두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5월에 이 위토가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처하자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국적인 기금 모금 운동이 일어나 위토를 되찾았다. 이 묘역은 1959년 5월 22일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되었으며, 1973년 7월 19일부터 이충무공 종손의 동의를 얻어 지금은 문화재청 현충사관리소에서 묘역을 관리하고 있다. (사적 112호)


문화재청 현중사 관리소 팸플릿에서

 








정조대왕어제신도비







참배 후 기념 사진




주변 소나무가 좋다. 올라왔던 다른 길로 내려갔다.










 ◎ 현충사


        현충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되새기기 위한 곳이다. 1706년(숙종 32)에 아산 유생들이 조정의 허락을 받아 세운 사당이며, 1707년 숙종 임금이 '현충사顯忠祠'라는 현판을 내렸다. 이후 충무공 이순신과 조카인 강민공 이완李莞을 모시는 사당이었으나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에는 충무공 종가의 경제적 형편이 어려워져 충무공의 묘소와 위토(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토지)가 은행 경매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 이에 동아일보를 중심으로 전국에서 이를 지키기 위해 기금 모금 운동을 벌였으며, 1년도 안 되어 묘소와 위토를 지키게 되었고 1932년 6월 현충사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이후 1966년부터 1974년까지 현충사 성역화 사업이 진행되면서 현재의 현충사를 다시 세웠으며, 1932년 지어졌던 구현충사는 지금의 위치로 옮기게 되었다. 해마다 충무공이 태어나신 4월 28일(음력 3월 8일)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하여 다례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사적 155호)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현충사 입구 전경




현충사 약도: 현충사 관리소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우리 일행은 시간이 없어서 관람 생략





충무문





능소화가 잘 피었다.





부지런히 오고 있는 일행들




잠시 모여서 문화 해설사 설명을 들었다.









 ◎ 현충사 현판에 대하여
  
       1932년 건립한 구 형충사엔 숙종 임금의 친필 현판이, 1967년 신축 신 현충사엔 박정희 전 대통령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2017년 충무공 이순신 가문 15대 종부 최순선씨가 신 현충사 현판을 숙종 친필 현판으로 교체하라고 요구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충무공파 종회는 나름대로 다 역사성이 있고 현판의 크기도 맞지 않아 반대하였다. 문화재청은 전문가들로 구성된 자문회의에서 "현판 교체는 신중해야 한다"는 자문회의 견해를 받아들여 신구 현충사 현판들을 현행대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정했다고 한다. 이를 전해들은 종손들도 대부분 문화재청의 결정에 공감했다. 선조와 관련된 일은 국민 모두 공경하고 숭배해야 할 사안으로 불필요하게 논란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홍살문紅─門.





충의문 뒤에 현충사다.





현충사 전경.


 고택
  
       이 집은 충무공이 보성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 성주 방씨와 21살에 혼인하여 32살 무과에 급제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집 옆에 은행나무 두 그루가 서 있는 활터가 있고, 뒤편에는 충무공의 신위를 모신 가묘家廟가 있다. 충무공 종가에서는 매년 음력 11월 19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
다.


문화재청 현중사 관리소




고택 뒤에 소나무가 매우 멋지다








고택 내부





정원이 잘 가꾸어졌다.




현충사 이용 안내, 현충사 관리소